119년 전 멕시코 땅에 처음 정착한 한인 이민 1세대
멕시코의 5월 4일은 한국 이민자의 날이다. 2019년 4월에 발행된 재외동포의 창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1905년 4월 4일 한인들은 영국 선박 일포드호를 타고 제물포항을 떠났다. 멕시코 서부 살리나크루스(Salina Cruz)항에 닻을 내린 것은 5월 8일이었으나 4일 뒤 하선을 허락받았다. 태평양을 건너는 도중 어린이 2명과 남자 어른 1명이 숨지고 아기 1명이 태어나 1,031 명이 멕시코 땅을 밟았다. 이들은 기차와 배를 갈아타고 5월 15일 멕시코 남동부 유카탄(Yucatán)주 메리다(Mérida)시에 도착했다.
1904년 12월 17일부터 이듬해 1월 13일까지 황성신문에 7차례 실린 멕시코 한인 노동자 모집 광고 문구를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북미 묵서가(멕시코)는 미합중국과 이웃한 문명 부강국이니, 수토(水土)가 아주 좋고 기후도 따뜻하며 나쁜 병질이 없다는 것은 세계가 다 아는 바이다. 그 나라에는 부자가 많고 가난한 사람이 적어 노동자를 구하기가 극히 어려우므로 근년에 일(日)·청(淸) 양국인이 단신 혹은 가족과 함께 건너가 이득을 본 자가 많으니, 한인도 그곳에 가면 반드시 큰 이득을 볼 것이다.”
대한매일신보에도 “4년 계약, 주택 무료 임대, 높은 임금”이라거나 “부녀자에게는 닭을 치게 하고 하루 노동 시간은 9시간이며 계약 기간이 끝나면 보너스로 은화 100원을 지급한다”는 등의 광고가 게재되기도 했다.
재외동포의 창에 따르면, 당시 멕시코에는 선박용 밧줄의 원료를 채취하는 에네켄(애니깽) 재배가 성행했는데, 스페인 식민지 시절의 전근대적 고용 관계가 남아 있는 데다 노동 강도가 매우 높아 농장주들은 인력을 구하느라 애를 먹었다. 광고 문구대로 1897년 일본에 이어 1899년부터 중국 인력이 들어왔으나 이내 중단됐다. 그러자 영국계 멕시코인인 국제 이민 브로커 존 마이어스가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서 성실성을 인정받은 한국인에게 유혹의 손길을 뻗쳤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신문 광고 문구들은 모두 거짓이었다. 새벽부터 해 질 녘까지 뜨거운 사막에서 가시투성이인 에네켄 잎을 잘라내야 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채찍질이 가해졌고, 견디다 못해 도망쳤다가 붙잡히면 감옥에 갇혔다. 집세도 따로 내야 하는 데다 임금은 멕시코까지 오는 비용을 갚기도 빠듯했다.
황성신문은 멕시코 이주노동자들의 참상을 사설로 보도했다. 재외동포의 창의 기사에 의하면, 이러한 참상을 알게 된 고종황제가 눈물을 흘리면서 “백성들을 구하라”라고 했지만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의 체결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1909년 5월, 4년의 계약 기간이 끝났지만, 조국은 사실상 국권피탈상태였고, 돌아갈 여비도 없어 새로운 조건으로 재계약하고 눌러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 가운데 274명은 1921년 쿠바로 건너갔다. 에네켄 농장은 1920년대 인조섬유가 등장하면서 문을 닫았지만 살아서 조국으로 돌아온 이민 1세대는 한 명도 없었다고 재외동포의 창은 전했다.
상기에도 다뤘듯 119 년전 한인들이 처음 멕시코땅에 발을 딛게 된 날은 5월 15일이다. 마르타 킴 멕시코시티 한인후손회장에 따르면, “2021년 4월 29일 멕시코 연방의회에서 5월 4일을 한인 이민자의 날로 지정했는데, 이는 한-멕시코 간의 우정의 상징이자 멕시코로 이주한 한인들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한인 이민자의 날을 지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멕시코에서도 5월 15일은 스승의 날인데, 날짜 중복을 피하기 위해 4일을 한인 이민자의 날로 지정했을 것이라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다.
현재 한인 이민자의 후손들은 메리다, 캄페체(Campeche), 멕시코시티 등에 정착해 살아가고 있다. 멕시코에 있는 한인 후손회들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간직하며 살아가기 위해 설날이나 추석 한국의 명절과 삼일절, 광복절 등의 한국의 국경일에도 행사를 개최하며 이 날들을 기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