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기자의 역사이야기-⑤
개국 제1회
이번 회부터는 고려의 멸망과정과 조선의 건국과정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 분야는 TV 드라마, 영화 등을 통해서 많이 다뤄진 분야이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되나 한국사공부가 쉽지 않은 교민학생들이나 이 분야에 몰랐던 분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이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조선의 건국은 신흥무인세력과 신진사대부세력의 결합으로 조선이 건국되었다고 배웠다. <신흥무인세력+신진사대부à조선건국> 이런 식으로 도식화해서 배웠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왜 신흥무인세력이고 신진사대부인가. 단지 그냥 새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그 보다는 신흥과 신진이라는 말을 쓰기 위해서는 그 이전시대 누군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바로 고려 무신정권 세력과 이제현, 이규보 등의 사대부들이다. 그들이 있기에 고려말의 신흥무인세력과 신진사대부라는 말이 가능하게 됐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다루기 위해서는 많은 등장인물이 필요하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성계를 필두로 하여 최영, 정도전, 정몽주, 이색, 이방원, 공민왕, 이인임 등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수반하게 되기 때문에 몇 회에 걸쳐서 이야기를 진행해보고자 한다.
공민왕의 반원자주 정책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 이야기는 항상 공민왕부터 시작된다. 공민왕때부터 조선 개국 주인공들이 등장하기 때문이고 공민왕의 몰락을 시작으로 새로운 국가 건설에 대한 작업들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1351년 몽골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던 강릉대군이 고려국왕으로 즉위하니 이가 공민왕이다. 당시 고려는 원의 부마(사위)국가였으므로 공민왕은 그의 부인 원나라의 노국대장 공주와 함께 고려로 돌아와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는 북으로 원나라와 홍건적, 남으로는 왜구들의 침략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왜구들이 400여척의 배를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을 때, 30대 중반의 젊은 장수가 매복작전을 통하여 왜구들을 무찔렀다. 그가 바로 최영이다.
당시 고려는 밖으로는 외적의 침입이 극에 달했고 내부적으로도 군사반란이 계속되던 시기였다. 1352년 공민왕이 원의 볼모로 잡혀 있던 시절 공민왕을 보필하던 조일신이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켜 본인이 권력을 찬탈하려 했다. 이 때 최영이 조일신의 난을 진압하게 되고 공민왕은 최영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게 된다.
1353년 원나라에서 한족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것을 장사성의 난이라고 하는데 이에 원나라는 고려에게 원군을 요청하고 최영, 정세운, 김용 등은 원나라로 출정하여 장사성의 난을 진압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 후 고려로 돌아온 최영 장군, 원나라에서 최하위 신분이었던 한족들이 반란을 일으킬 정도로 나라가 약해졌다는 것을 파악하고 공민왕에게 반원 자주정책을 펼칠 것을 건의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국내 정치가 변화의 조짐을 보일 때는 국제정치의 변동이 그 한 원인을 제공한다. 첫째로 지금 이 시기가 그러하고, 둘째로 금에 사대하면서 나름 안정적으로 살고 있었던 고려 문벌귀족들은 몽골이 북방을 점점 장악해 나감에 따라 무신정권의 난이 일어나면서 몰락하기 시작했다. 무신정권은 몽골과 전쟁에 들어갔으나, 몽골이 중원까지 차지하면서 점점 강성해지자 무신정권은 힘을 잃고 원간섭기에 들어오면서 이제는 권문세족의 시대가 된 것이다. 이들은 왕권을 뛰어넘는 권세를 누리고 있었으며, 이들의 소유한 토지는 당시 표현으로 하면 그들 소유의 땅은 산과 강이 그 경계라고까지 했다.
권문세족들이 왕보다 큰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원제국의 힘을 등에 업었기 때문이다. 특히 권문세족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기철은 원나라 기황후의 오빠이자 황제의 외삼촌이었고 후에 소개될 이인임, 염흥방, 임견미 등도 친원파 권문세족으로 고려말에 막강한 권세를 누렸다.
최영 또한 철원 최씨로 그 또한 권문세족에 속하는 사람이었지만 그가 본인의 욕심이나 이익을 탐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군인으로서의 직분을 다한 백전백승의 장수였으며,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그의 아버지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평생 청렴한 생활을 영위하며 임금에겐 절대적 충성을 바친 인물이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우리는 그를 존경하며 기억하고 있다.
1356년부터 공민왕은 반원자주정책을 펼친다. 원나라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 척살을 시작으로 원나라식 복식을 금하고 한반도내의 원나라가 직접 통치하는 정동행성, 쌍성총관부 등을 폐지하기 시작했다.
훗날 명나라의 건국세력이 되는 홍건적은 당시에는 그야말로 도적떼 그 자체였다. 1359년에 1차와 2차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는데 1차는 4만명의 병력이 침공했지만 패주했고, 2차는 20만명이 침공하여 이들은 서경을 지나 개경을 함락시키기까지 했다. 당시 공민왕은 안동까지 몽진하게 되고 여기서 오늘날까지 유명해진 것이 안동소주, 공민왕이 안동에서 머물렀던 영호루 라는 정자이다. 영호루라는 정자는 공민왕이 개경으로 환도후에도 안동을 잊지 못해 직접 현판을 썼다고 한다.
최영, 이성계, 정세운, 이방실 등의 무인들은 홍건적으로부터 개경을 탈환하는데 성공했지만 개경에서 왕의 궁궐이었던 만월대가 불타는 바람에 공민왕은 당시 고려 최대사찰인 흥왕사에 머무르게 됐다. 여기서 김용이라는 장수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를 최영이 진압하고 김용을 직접 처형하였다. 개경탈환과 흥왕사의 변을 계기로 최영, 이성계 등의 신흥무인세력이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1363년에는 원나라가 침입했다. 당시 원나라 최고 권력자였던 기황후가 자기 오빠였던 기철을 공민왕이 살해했다는 명분으로 고려 장군이었던 최유와 유인우를 시켜 원나라 군대와 함께 고려를 공격하게 했다. 기황후는 원나라의 사신으로 갔던 고려의 유인우에게 1만병력을 내줬고, 덕흥군을 고려의 새로운 왕으로 내세우려 했다. 덕흥군의 난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에서 최영과 이성계가 난을 진압하는 데 성공한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
1365년, 공민왕이 오로지 사랑했던 한 여자 노국대장공주가 사망했다. 이후의 공민왕은 제 정신이 아니었고, 모든 정치는 신돈에게 맡겼다.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노비를 해방시키는 등 여러가지 개혁정책을 펼쳐 나갔다. 개혁정책을 통하여 권문세족을 견제했고, 홍건적 침입이후의 급성장한 신흥무인세력 또한 견제할 필요성을 느꼈다. 당시의 무인세력들이 유배에 보내지는 상황이 발생했는데 최영 또한 이 때 유배길에 올랐다.
공민왕의 정치스타일을 잠깐만 설명하자면, 인재라고 생각되면 최대한 자기 곁에 두고 최대한 활용하다가 본인을 위협한다고 생각되면 내치는 스타일이다. 그러기에 김용이나 조일신처럼 그에게 반기를 든 신하도 있었고 정세운이나 신돈 같은 이를 죽이기도 했다. 또한 항상 공민왕에게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자신을 구해준 최영 같은 장수도 유배를 보냈다.
신돈이 제거된 후, 최영은 6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다시 관직에 복귀한다. 그리고 1374년 제주도에서 목호의 난이 일어나 명장답게 난을 평정하고 다시 개경으로 복귀하려는 최영… 그리고 고려가 원나라로부터 수복했던 쌍성총관부….
<다음회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