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외교 정책의 강자 헨리 키신저, 100세 일기로 사망
일부에서는 전범, 다른 곳에서는 뛰어난 전략가로 평가받아
20세기 미국 외교사의 큰 거물,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이 100세 일기로 사망했다. 미국 현지시간으로 지난 29일 코네티컷주 그의 자택에서 사망한 것으로 발견됐다. 아직까지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는 닉슨 대통령과 포드 대통령시절 국무장관을 지내면서 미국과 전세계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헨리 키신저는 1923년 5월 27일 독일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나치 정권을 피해 1938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키신저는 1943년부터 3년동안 미 육군 제84사단에서 복무했다.
그 후 하버드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고 1950년 우등으로 졸업했다. 군사적, 학문적 명성을 바탕으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1969년 그를 국가안보보좌관, 1973년 국무장관으로 임명했다.
닉슨과 키신저는 냉전시기 소련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해 전세계에 활발한 외교전을 펼쳐 나갔다. 특히 중소분쟁을 이용하여 1972년 중국의 마오쩌둥 주석과 저우언라이 총리를 만나 미중 관계회복에 상당한 기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0년 칠레 등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쿠데타에 개입하여 친미 군사독재정권수립에 역할을 했다. 칠레에서 마르크스주의자인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미 중앙정보국(CIA)은 반대파의 새 정부 전복을 돕고자 비밀 활동을 전개한다. 그리고 이 작전을 승인한 위원회의 의장이 바로 키신저였다. 그는 “국민들의 무책임함 때문에 한 나라가 공산주의로 향하는 걸 왜 우리가 지켜만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이기에 칠레 유권자들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칠레에선 군부가 들고 일어섰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의 유혈 쿠데타에 아옌데 대통령은 사망했다. 이후 피노체트의 군인 다수가 CIA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이후 키신저 또한 칠레 군사 정권하에 자행된 인권 유린 및 외국인의 사망을 조사하고자 열린 여러 법정에서 언급되며 비난을 받기도 했다.
미국의 베트남 참전에 대한 비판이 일자 키신저는 임시 휴전을 성사시켰고, 미국이 베트남 전에서 철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파리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데 기여했다. 이 공로로 197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키신저는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미국 자녀에게 상을 기부했으나 그로부터 2년뒤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침공하자 노벨상을 반납하려 했다.
키신저는 중동정책에도 관여하면서 이스라엘과 이집트를 중재하여 욤키푸르 전쟁을 종식시켰다.
그 후에 미국에 들어선 클린턴, 부시 정권 등에 대해서도 비판과 조언으로 미 정계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트럼프 정부가 들어섰을 때 백악관을 찾아가 그에게 브리핑을 하기도 했으며,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크림반도 점령을 인정하는 발언까지 하기도 했다.
100세가 됐을 때, 여러 차례 심장수술을 받았음에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러우 전쟁이 끝나면 우크라이나는 나토에 가입해야 하며, 중국에 대해서는 “미중 양측 모두 상대방이 전략적 위험이라고 확신하고 있다”며 “우리는 강대국 간의 대결로 향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많이 갈린다. 일부에서는 그를 전쟁전범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그를 뛰어난 전략가로 생각한다.
그는 “미국에는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고 오직 이해관계만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으며, “외교정책에서 도덕적 완벽함을 추구하는 국가는 도덕적 완벽함도, 안보도 달성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