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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기자의 역사이야기-⑧ 고려는 왜 멸망했을까?

개국 제4회 드디어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하는 이성계

1380년, 왜선 500여척을 끌고 고려를 들어와 노략질을 하던 왜구들은 그들이 돌아갈 배를 전부 잃게 되자 악에 받쳐 더욱 심한 노략질을 전개하게 된다.

왜구의 문제는 고려조정의 가장 큰 골칫거리중의 하나였다. 고려말기 169년 동안에 왜구의 침략횟수는 500회가 넘는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중 1380년 있었던 왜구침입은 고려 역사상 가장 극심했다. 그들과의 전투 또한 여태껏 고려가 겪었던 왜구와의 싸움 중 가장 어렵고 처절했던 것으로 역사는 묘사하고 있다.

이 당시에는 일본 혹은 왜국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왜구라고 표현하고 있다. ‘구’라는 것은 도적을 의미하는데 결국 왜국에서 온 해적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국가단위의 정규군이 아니다. 그러나 해적집단이라고 해도 그들은 어느 국가 정규군 못지않게 전략과 전술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잘 훈련된 군대 조직이라고 불릴 정도로 강력했고 한반도와 중국을 넘나들면서 노략질을 일삼았다. 특히 중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이 약해질 무렵이면 항상 출몰하여 동남아까지 진출하는 등 이는 고려, 조선, 원, 명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골칫거리였다.

1380년 고려에 침입한 왜구의 숫자는 지금까지 명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지만 당시 왜선 500여척을 가지고 계산해보면 만 5천에서 2만명 정도가 고려에 침입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조선침략의 선봉에 나섰던 고니시 유키나가군이 만 8천명임을 감안해 본다면 한 국가의 정규군 규모의 해적들이 고려를 침략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경기, 충청 지역에 있었던 왜구들은 좀 더 남으로 내려가 지금의 전라, 경상지역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만행은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당시에 포로로 잡은 어린아이들을 죽이거나 온 마을을 쑥대밭을 만들기도 했고, 심지어는 두 세 살 난 어린 여자아이를 죽이고 깨끗이 씻겨 쌀과 술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왜구들은 승승장구하던 상황에서 전북 남원지역을 접수하기 위해 남원산성을 공격했으나 이에 실패했지만 고려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당시 고려 장군들은 변안열, 배극렴, 박임종 등이 활약했지만 왜구들을 막아내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왜구의 최고 지휘관은 아기발도라는 장수인데 나이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알려져 있지만 워낙 지략이 뛰어나서 왜구들이 자청해서 그를 대장으로 모시고 고려를 침공했다고 일컬어진다.

이에 고려조정은 특단의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동북면 병마사 이성계 장군을 불러 왜구를 격퇴하기로 결정했다.

이성계는 삼도 순찰사에 임명되고, 그의 의형제인 여진족 출신 이지란, 훗날 조선의 2대임금이 되는 그의 아들 이방과와 그의 충성스러운 군대인 가별초를 이끌고 남원에 도착했다. 여기에 정몽주 또한 종사관으로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남원에 도착한 이성계는 운봉 분지를 지나 황산 서북쪽에 도달하여 정산봉에 올라 적진을 살폈다. 그는 적군을 분산시키는 작전을 선택했다. 다음날, 장졸들에게 지시했다.

-적군들은 우리의 뒤를 칠 것이니 우리도 부대를 둘로 나누어 나와 가별초는 오른쪽 작은 길로 빠르게 움직이고 나머지 부대는 평탄한 길로 가도록 한다.

드디어 황산대첩의 서막이 올랐다. 왜구들은 평탄한 길로 향하는 고려군을 쫓았다. 고려군을 공격할 겨를도 없이 뒤돌아 돌아온 이성계의 가별초 군과 맞써 싸워야 했다.

왜구들은 고려군으로부터 상당한 피해를 입자 산 위에 진을 치고 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 산 아래에 있는 고려군에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고려군은 산을 올라가며 계속해서 전투를 치러야 했고 상황이 불리해지자 이성계가 직접 나서서 싸울 수 밖에는 없었다. 워낙 전투가 치열했기 때문에 최고 사령관 이성계 또한 왼쪽다리에 화살을 맞았다.

KBS 드라마 정도전 속 이성계/유동근 배우

이성계는 화살을 뽑아 계속 싸움에 임했고, 적장 아기발도 또한 명장 답게 고려군을 무찔러 가며 난전은 계속됐다. 일본군의 갑옷을 지금도 연상해보면 장군들은 얼굴까지 가리는 투구를 쓰고 싸우는 모습을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흔히 접하게 된다. 그런 적장과 싸우고 있는 이성계는 적장의 얼굴에 화살을 맞추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성계는 고심 끝에 자신의 의형제인 이지란에게 지시한다.

-지란이, 내가 아기발돈지 하는 놈 화살로 투구 끈을 맞춰서 투구를 벗겨볼 테니까 네가 저놈 머리를 맞춰라

-알겠습니다. 성님

이성계는 본인의 활 사거리까지 성큼성큼 다가가서 아기발도에게 활을 겨눈다. 만약 투구 자체를 맞추거나 투구 끈을 맞추지 못하면 고려군은 물론 가별초 군사들까지 잃을 상황이었다. 이성계는 긴장을 멈추지 않고 활시위를 끝까지 잡아당겼고 손을 놓는 순간 활은 아기발도 투구 끈을 살짝 스쳐가며 투구가 땅에 떨어졌고, 드디어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지란아!!

이성계는 이지란을 다시 한번 크게 부르고 이지란은 아기발도의 머리에 본인의 화살을 명중시켜 적장을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 적장의 사살 소식에 왜구들은 우왕좌왕하며 사기가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왜구들은 도망가기에 급급했고, 사기가 충천한 고려군은 적들을 섬멸해 나가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당시 왜구의 숫자는 고려군의 10배 정도라고 하고 있는데, 이성계의 황산대첩으로 살아 돌아간 왜구의 숫자는 고작 70여명밖에 되지 않았다.

개경에 개선장군으로 도착한 이성계는 고려 국왕 우왕 등의 환대를 받았고, 최영은

-그대의 이 한번의 싸움으로 삼한이 다시 일어나게 됐네. 그대가 아니면 이 나라는 누구를 믿겠는가.

라며, 그의 공을 치하했다.

최영의 이 같은 말은 일리가 있었다. 이 전쟁을 계기로 왜구의 침입이 수그러들기 시작했으며, 오히려 고려가 왜구 정벌에 적극성을 띄게 됐다. 이러한 것이 바탕이 되어 훗날 세종 원년 대마도 정벌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국민적 영웅이자 스타로 발돋움한 동북면 병마사 이성계 장군. 이제 그의 대권을 위한 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1577년 전라북도 남원에 이 전장터에 황산대첩비가 세워지게 된다. 그 후 약 400년간 잘 버티고 있었던 이 비석은 1945년 1월 일제 강점기 때 남원 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이 폭파시켜 없애 버렸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1977년 그 파괴된 파편들을 가지고 복원한 것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황산대첩비의 모습이다.

황산대첩 헌화식/사진-전북 중앙

<다음회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