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기자의 역사이야기-⑦ 고려는 왜 멸망했을까?
개국 제3회 드디어 등장한 권문세족 끝판 왕
1374년, 개경으로 향하는 최영, 조정에서 변란이 일어났으며, 그의 주군이었던 공민왕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제위의 홍륜과 내관 최만생에 의해 시해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등장했다.
바로 ‘이인임’, 이인임은 궁궐에서 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재빠르게 궁으로 출동하여 국왕을 시해한 홍륜과 최만생을 죽이고 사건을 수습했다. 그리고 공민왕의 아들 모니노를 왕위에 세우려 하였다. 최영은 개경궁궐에 도착하여 명덕태후 공원왕후로부터 사건의 전후관계를 듣고 무장을 한 채 이인임 집을 찾아갔다. 최영은 이인임에게,
-그대는 증좌도 없이 전하의 유훈을 들먹이며, 왕실을 겁박한 것이 사실인가
천하의 이인임도 고려의 명장인 최영이 무기를 들고 자기집에 들어오니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를 설득하여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계책을 세운다.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는 최영이다. 재물로는 택도 없다는 것쯤은 이인임도 잘 알고 있었다. 이인임은,
-장군께서는 지금의 고려가 왜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야, 자네 같은 권문세족 때문 아닌가. 국정농단에 백성들 착취하는 것 말일세.
-그렇다면, 저와 권문세족이 물러난다면 이 나라 고려, 좋아지리라 자신할 수 있으십니까.
-…
-장군, 결코 내부만의 문제로 돌려서는 안됩니다. 외부의 적들이 너무 강하기에 우리가 힘이 없어지고 약해진 것입니다.
-그들이 누군가.
-명나라와 북원입니다. 장군
이인임이 정권을 잡는 시대가 되면 명은 점점 성장하여 중국은 북원과 명으로 두개의 국가로 나뉜다. 중국은 진시황때부터 현대 공산정권까지 서에서 동, 북에서 남으로 진출하여 통일을 이뤄냈다. 진시황의 진나라가 그랬고, 한나라의 유방도 서촉에서 자리잡기 시작하여 동으로 진출하여 통일을 이뤄냈다. 우리가 삼국지라고 부르는 시대 때에도 촉의 제갈량이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간파하고 북벌을 감행한 것이다. 수나라는 북쪽에서 시작했으며, 원나라, 청나라 이민족들도 북쪽에서 내려와 중국을 정복했다. 현대 국공내전때도 북쪽에서 자리잡은 공산당이 난징을 수도로 정했던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을 장악했다. 그러나 명 태조 주원장만큼은 달랐다. 주원장은 명의 난징을 수도로 정했지만 중국을 장악하고 있었던 원을 북쪽으로 계속 밀어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인임은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안타깝지만 지금의 우리는 저들만큼 강해질 수 없습니다.
-그럼 뭘 어찌하자는 것인가.
-땅의 크기가 다르고 백성의 숫자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이길 수는 없으나 저들을 약해지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강해질 수 있습니다.
점점 최영은 무장을 하고 온 사실을 잊은 채 이인임과의 대화에 빠져들었다. 이인임은 이어,
-지금의 형국은 한 나라가 중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나라가 서로 싸우는 형국입니다. 이 때에 우리는 그들을 계속 싸우게 만들면 됩니다.
-그렇다고 해도 어느 한 쪽이 이길 것이 아닌가.
-맞습니다. 장군.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영원히 싸우게 만들면 됩니다. 명이 강해지면 북원을 지원하고 북원이 강해지면 명을 지원하면 됩니다. 그 사이 우리는 중간에서 이득을 보면 됩니다. 그렇게 저 둘을 계속 싸우게 하다 보면 최후의 승자는 우리 고려가 될 것입니다. 장군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후계 군왕 문제는 왕실이 정할 사항인데 자네가 왜 나서는 건가. 지금 그가 신돈의 자식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는 것을 모르는가.
-장군께서는 그 소문이 근거가 있다고 생각 하십니까. 그 소문을 누가 퍼뜨리고 있습니까. 오로지 공자왈, 맹자왈만 외쳐대는 사대부들입니다. 그들은 나라밖 형세를 전혀 모른 채 자기들이 떠받들 명나라를 따르는 친명 성향의 군주만 원할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강령군께서 전하의 유일한 핏줄인 상황이니 명분을 중시하는 저들이 강령군의 계승을 막을 방법이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들은 신돈의 아들이니 이상한 소문만 퍼뜨리고 다니는 겁니다. 나라밖 정세만 모른 채 명나라 편만 들어서야 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반원정책을 펼치셨던 전하께서도 그런 사실을 미리 아시고 소신에게 강령군께서 보위를 잇도록 유지를 남기신 겁니다.
최영도 듣고 보니 이인임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검증을 못한 채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
-알겠네. 강령부원대군께서 보위를 잇도록 하세나. 그러나 강령부원대군께서는 아직 열 살이시네. 그러니 태후마마께서 수렴청정을 할 수 있도록 하시는게 어떠하겠나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장군
이로써 모니노라고 불리던 강령군이 왕위로 즉위하고 그가 바로 우왕이다. 공원왕후가 사망한 1380년 이후로는 이인임은 섭정까지 담당했고, 우왕은 그를 양부로 대접했다. 최영까지 이인임의 편이 되면서 그야말로 이인임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인임이 최영에게 이중 외교의 중요성을 설파했다고는 하지만 실제 이인임은 친원 정책을 펼쳤다. 친명을 원하는 신진사대부와의 충돌은 당연한 것이었다. 발단이 된 사건은 이인임이 북원사신을 고려에 받아들이기로 한 것으로 시작됐다. 신진사대부들은 북원 사신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연일 상소를 올렸고, 어떤 사대부들은 이인임의 탄핵상소까지 제기했다.
이 일로 정몽주, 정도전 등은 유배를 가게 됐고, 특히나 당시 30대였던 정도전은 이인임을 직접 찾아가 현시국의 부당함을 알렸으나, 오히려 이것이 화근이 되어 다른 사대부들보다 유배생활을 더 오래한 계기가 됐다. 반면에 염흥방 같은 신진사대부는 이인임이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신진사대부가 권문세족이 되기도 했다. 훗날 이방원이 왕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하륜은 이인임 동생인 이인미의 사위이다. 그도 신진사대부지만 이 당시에는 이인임 사람이었다.
그리고 1380년, 지금의 충청도, 경기도 지역에 왜구가 배 500여척을 이끌고 쳐들어와 노략질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고려는 진포에서 최무선의 화포를 이용하여 적선을 모두 격파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왜구들은 배를 모두 잃게 되자 남쪽지방으로 내려가 더 심한 노략질을 하는데…
<다음회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