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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기자의 역사이야기 – ④

같으면서도 다른 전쟁 임진왜란과 6.25 – 제2편

6. 수도장악에 대한 적군들의 오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기 전 일본은 그야말로 전국시대로 각 지역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일본은 섬나라였기 때문에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면 자기 영지를 끝까지 지키다가 전사하거나 할복 혹은 항복을 하는 것이 그들 관행이었다. 성주가 자기 영지를 버리고 도망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은 조선과의 전쟁은 왕만 잡으면 금방 끝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20일만에 한양에 들어갔는데 왕이라는 자가 도망갔다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면서 그들의 전쟁은 점점 미궁속으로 빠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50년 서울만 함락하면, 남로당의 박헌영이 남한내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켜 전쟁을 빠르게 종식시킬 줄 알았건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결국 남진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7. 전쟁의 판도를 바꾼 두 영웅

임진왜란때, 의주까지 피란을 떠났던 선조는 저 남쪽바다 멀리서 승전소식을 접하게 된다. 바로 이순신의 옥포해전 승전소식이다. 이후의 전라좌수사 이순신 덕택으로 일본군들이 서해바다로 진격해 평양성에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보급을 하려는 계획과 당시 조선의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장악하여 식량을 보급받으려는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됐다.

만약, 임진왜란때 전라도가 뚫렸다면, 어떻게 되었을 지는 한국전쟁을 극명하게 알 수 있다. 1950년 9월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펼치게 된다. 이로써 인천을 점령하고 바로 서울을 수복한 유엔군은 북진의 기회를 잡았으며, 북한군에게는 보급선을 끊어버리는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남쪽에 있는 북한군들을 발이 묶이게 되는 상황을 오게 했다. 남쪽에 있는 북한인민군을 가리켜 남부군이라고 불렀으며, 이와 관련된 영화도 제작되기도 했다.

역사에 만약을 제기하는 것이 의미 없는 일이긴 하지만 이순신이 없는 상태에서 서해로 들어가는 바닷길이 일본군에게 열렸다면, 평양에 주둔하고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충분한 보급이 이루어져 선조가 있는 의주까지는 쉽게 북진이 가능했을 수 있을 것이고 평양성 남쪽지역부터 부산까지 일본군의 조선군 포위가 가능해져 조선군의 전쟁수행의지를 꺾어버렸을 것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8. 명나라와 중공군의 참전

명나라와 중공군의 참전 또한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이 비슷하다는 인상을 갖게 하는 장면이 될 수 있다. 임진왜란때,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양성에 있으면서 의주에 있는 조선왕 선조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요동에 있던 명나라 군대가 내려오면서 전쟁이 양상이 다시한번 바뀌게 됐는데, 이 때 참전했던 명나라의 논리는 조선과 명나라는 이와 잇몸의 관계 즉, 순치의 관계라는 것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맥아더 유엔군은 서울을 수복하고 계속 북진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이승만 대통령은 부산에서 나와 서울을 지나 평양에서 시민들 앞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공과 북한의 순치의 관계는 여기서도 적용됐다. 한반도가 통일되어 서방의 자본주의 진영이 중국의 턱밑까지 오는 것은 중공입장에서는 절대로 허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산주의 국가간의 이와 잇몸의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중공은 대규모 병력을 한반도에 파견했다.

명나라가 조선에 구원병을 보낼 시점은 거의 명나라 말기로서 조선의 무리한 출병으로 인해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중국 공산당은 1949년 중국을 장악한 후 1년 남짓 1950년 10월에 한반도에 중공군을 파견했다.

즉 망국시점과 개국시점에 군대를 파견했다는 다른 점이 있지만 나라가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서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다는 점은 동일하며, 그만큼 중국에겐 한반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500년이 지나도 여전히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9. 전시 작전권이양과 협상

임진왜란은 명군이 참전함으로해서 모든 군작전에 대한 통제권은 상국인 명나라가 가지고 지휘하게 된다. 이승만 정권은 미국과 유엔군이 전쟁이 참전함에 따라 전시 작전권 또한 유엔군 사령관인 맥아더에게 위임한다. 임진왜란은 1593년부터 정유재란 발발시점까지 한국전쟁은 1951년부터 강화협상에 들어간다.

강대국의 셈법은 우리와 달랐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일본군이 한반도에 북상하지 않으면 그만이고, 미국 입장에서는 공산군이 3.8선아래로만 오지 않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즉, 남한의 공산화만 막으면 되는 것 뿐이었다.

이제부턴 협상의 유리한 고점을 차지하기 위해 영토확장 보다는 지금 점령하고 있는 땅을 지키는 것이 우선순위였다. 임진왜란 시기에 일본장군들은 왜성을 쌓기 시작했고, 한국전쟁 때 인민군들 또한 그들이 말하는 조국해방보다는 협상때 조금이라도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흔히 말하는 고지전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 이 시기 부터다.

10. 항상 협상과정에서 분단을 논의

임진왜란의 경우 명과 일본의 협상에서 주로 논의됐던 것이 조선의 분할이었다. 당시에 하삼도라고 불렸던 충청, 전라, 경상은 일본이 갖고 그 위쪽은 조선이 통치하는 것으로 하자는 제안이었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반대의사를 표명했으며, 이외 다른 요인들에 의해 명과 일본과의 강화협상은 결렬되고 정유재란이 일어났지만, 조선은 일본군을 모두 내쫓아 국토를 온전하게 보전할 수 있었다.

1953년 휴전협정때, 이승만은 휴전협정에 반대하여 서명하지 않고,  북진통일을 주장했지만 전작권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결국 한국전쟁은 당시 전쟁에 참전한 강대국들에 의해 휴전으로 협상을 결론짓고, 지금까지 우리는 분단된 조국을 바라보며 살고 있다.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은 공통점이 많아 보이는 전쟁이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지리적 특성, 지정학적 위치에 따라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다. 한반도는 남과 북이 길기 때문에 보급선이 길어지는 단점이 생길 수 밖에 없고,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한반도 문제발생시 강대국들이 관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