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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기자의 역사이야기 – ③

같으면서도 다른 전쟁 임진왜란과 6.25 – 제1편

호국 보훈의 달 6월을 맞이하여 6.25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우리 역사상 전국토가 황폐해졌던 큰 전쟁들을 고르라면,  6.25 한국전쟁, 임진왜란, 몽골항쟁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과 6.25한국전쟁, 두 전쟁은 500년의 차이를 보이며 전혀 다른 시대에 있었던 일이지만 두 전쟁의 양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같으면서도 다른 전쟁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미리 밝혀 두지만 이런 양상들을 보이는 이유는 우연이 아니라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위치와 지리적 특성에 기인하는 부분이 크다.

두 전쟁을 비교하기에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1편과 2편으로 나누어 설명하도록 하겠다.

1. 두 전쟁 모두 국제전의 양상을 띄고 있다.

아주 간단하게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만의 전쟁이 아니라 당시 중국 명나라까지 참전하고 동아시아의 국제정세 판도를 바꾸는 동아시아 국제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북방 여진족의 맹주였던 누르하치까지 전쟁에 참전하고자 했었으니, 만주의 여진족까지 참전했다면 전쟁의 양상은 훨씬 커졌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한국전쟁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남북한 만의 전쟁이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16개국가로 구성된 유엔군과 중공군이 대결을 펼친 누가 뭐라해도 국제전쟁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전쟁이었다.

2. 침략군의 선진무기와 빠른 수도 함락

임진왜란 당시 부산 동래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빠르게 북상하여 단 20일만에 서울을 장악했다. 이렇게 빨리 서울을 함락 시켰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들의 발달된 신무기인 조총의 힘이 무엇보다도 컸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당시 소련제 탱크인 T34를 앞세워 남침을 도발했다. 당시 무기사정이 열악했던 한국군으로서는 계속해서 밀릴 수밖에 없었고 서울은 3일만에 함락됐다.

3. 두 국가원수들의 피란루트

우리가 중고등학교 한국지리 시간에 한반도 지도를 놓고 신의주에서부터 부산까지 대각선으로 줄을 긋고 배운 내용이 있다. 신의주에서 부산까지 줄을 그었을 때 위쪽은 산지가 많고 그 아래 쪽은 평야지대라고 배웠다. 그런데 이것이 방향은 다르지만 두 국가원수의 공통된 피란루트가 된 것이다.

선조는 한양에서 출발해서 지금의 신의주 지방인 의주까지 피란을 가게 되어 우리나라 서북쪽 끄트머리까지 다다르게 됐다.

1950년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 대구를 거쳐 결국 동남쪽 끄트머리인 부산까지 다다라 그곳에 임시수도를 정하게 되었다.

4. 국민들의 피란을 막은 당시 지도자들

선조의 몽진이 시작됐을 때, 개성에 도착할 무렵, 그는 임진강 주변의 민가와 나룻배 까지 모두 철거를 명령했다. 당시 민가들은 목재로 지어졌는데 선조의 논리는 그 목재를 가지고 배를 만들어 일본군이 북상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일본군도 쫓아오지 못하겠지만 백성들의 피란길을 막는 셈이 된 것이다.

1950년 라디오 방송에서는 우리 국군이 이기고 있다고 선전중인 동시에 대통령이 서울을 빠져나가려 할 즈음  6월 28일 새벽 2시반 한강 인도교 철교가 폭파됐다.

5. 적군들의 이동경로

임진왜란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제일 먼저 서울을 함락한 후 평양까지 진격했으나, 그 이후에 더 이상 진격을 하지 못했고, 북한군도 3일만에 서울 함락 후 낙동강 전선에서 지지부진 했었다. 이 두 부분에 대해서 아직은 미스테리로 남고 있지만 많은 의견들 중의 하나가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이라는 시각이 있다.

한반도는 세계지도에서 보기엔 작아 보이지만 한반도 지도만 놓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위아래가 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보급선이 길다는 것이다. 선봉부대가 지나치게 빠르게 치고 나가게 되면 결국 보급에 어려움이 생겨 다음 진격에 장애가 생길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