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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기자의 역사이야기 – ②

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웅장한 꿈

동방의 알렉산드로스 광개토대왕

고구려! 그리고 광개토대왕! 이 말만 들어도 우리는 가슴이 벅차 오름을 느낀다. 우리는 외국에 나가면 KOREA  혹은COREA라고 우리나라를 소개한다.  왕건이 세운 고려가 벽란도 상인들과 무역을 하면서 고려라는 이름이 아라비아 상인들에게 전달되어 서양에 코리아라고 알려졌다고 그렇게 배웠다. 왕건이 고려를 창업할 당시에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고려라고 졌다고 배웠지만, 사실 고려라는 이름 또한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고구려에서 고려라고 바꾼 것이 첫 시작이다.

이번 회에서는 고려라는 국호의 유래를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고 광개토대왕의 못다 이룬 웅대하고 거대한 꿈과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 한다. 먼저, 광개토대왕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광개토태왕이라고 불리기도 하나 주로 학계나 공개석상에서는 ‘대왕’으로 호칭을 주로 써서 광개토대왕이라고 하겠다(필자 또한 태왕이라는 호칭을 원한다).

광개토대왕은 서기 374년 혹은 375년생으로 알려져 있다. 사망연도 또한 정확치가 않아 412년 혹은 413년에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사망한 나이는 38~39세 정도이며, 즉위는 391년으로 재위기간은 20년 정도로 우리는 알고 있다.

즉위 원년부터 왕이 되자마자 그의 정복전쟁은 빛을 바라기 시작했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왕이 된 그 해 7월, 백제를 공격하기 시작해  10개의 성을 점령하고, 9월에는 북쪽 거란을  공격하여 포로500명을 사로잡아오면서 거란으로 도망갔던 옛 고구려인  1만명을 고구려로 다시 귀속시켰다. 10월에는 수군을 활용하여 철옹성이라고 불리는 백제의 관미성을 공격하여 20일만에 함락 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그 후 그는 동서남북으로 활발한 정복전쟁을 폈고, 고구려 전성기의 서막을 알리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동방의 알렉산드로스’ 혹은 ‘한국사의 알렉산드로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구려의 남진정책

삼국사기 기준으로 그는 413년 세상을 떠난다. 광개토대왕 사후 장수왕은 남진정책을 통하여 평양으로 수도를 천도하고 한강유역의 지배권을 확보하였다고 우리는 그렇게 배웠다. 그래서 우리는 남진정책은 장수왕의 업적이고 한강유역을 점령하여 쌀생산량의 증대로 고구려는 군사강국으로도 거듭날 수 있었다고 배웠다.

그러나 남진정책은 광개토대왕때부터 계획한 국가 프로젝트의 하나였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409년 임금이 남쪽 지역을 순행하였다.” 라는 기록과  “409년 7월, 동쪽 지방에 독산 등 여섯 개의 성을 쌓고, 평양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이 기사들로 비추어 보면, 이미 광개토대왕은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기 위해 세상을 떠나기 4년전 남방지역을 순행하고, 평양지역에 성을 쌓고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등의 수도 천도작업을 이미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진정책의 시행은 장수왕 뿐만 아니라 그의 손자인 안장왕 까지 이뤄졌다. 그렇다면 왜 고구려의 전성기 왕들은 그 드넓은 대륙을 놔두고 이 좁디 좁은 반도지역으로 들어오려고 했을까.  현대인들은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했기 때문에 수세적인 전략이 시작되면서 드넓은 대륙으로 뻗어 나가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광개토대왕은 바다를 통한 해상무역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깨달았을 것

과연 이 세상에는 대륙만 존재할까.  우리는 가끔 더 큰 세상을 위해 지도를 거꾸로 보자고 말한다. 지도를 거꾸로 놓고 고구려 수도 국내성에 있었던 광개토대왕의 생각을 유추해보자. 중원대륙인 서토로 가는 것이 넓은 세상일까 아니면 저 끝없는 바다가 더 넓은 세상일까. 정답은 더 말하지 않아도 자명하다.

서기 371년 제16대 고구려 고국원왕은 평양성에서 전사한다. 고구려의 비극적인 역사 중의 하나였고, 왕의 전사는 당시 지정학적인 고구려의 위치로 본다면 상당히 국가적 위기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를 전사하게 만든 백제의 왕은 누구였는가.  바로 백제의 영웅이자 백제를 전성기로 이끈 근초고왕 이다.

우리가 백제의 전성기를 역사지도에서 볼 때 왜 이렇게 영토가 작지? 이게 무슨 전성기인가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지도를 잘 살펴보면, 당시의 백제는 한반도 내에서의 영토확장 보다 바다건너 식민지 건설에 역점을 뒀던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한국사 시간에 이런 것도 배웠다. 한강유역을 차지하면 쌀생산량도 증대되지만, 중국과의 무역교류도 많아져서 전성기가  올 수 밖에 없다고 배운 적이 있을 것이다.

백제는 건국초기부터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상태에서, 근초고왕은 요서지방, 산둥반도 그리고 왜(일본)까지 바다와 가까운 해안가 지역에 백제 식민지를 세우면서 바다를 장악하려 했다는 것을 보면 근초고왕은 대륙 보다 바다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지난 동서양의 역사, 그리스, 페르시아, 로마, 몽골, 스페인, 영국 등의 역사를 보면  제국의 경제는 자급자족 경제가 아니라 무역을 통하여 제국으로 성장하고 그 제국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4세기의 근초고왕도 바다의 중요성을 인식, 무역의 중요성을 깨달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375년 백제의 근초고왕이 사망한 해, 광개토대왕이 태어난다. 그의 백부인 소수림왕, 그의 아버지 고국양왕은 고국원왕의 죽음을 그 누구보다도 가슴 아프게 생각했을 것이고, 그러한 아픔은 광개토대왕에게 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광개토대왕이 왜 자기 할아버지가 그렇게 죽음을 당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분석과 고심이 있었다면, 바다를 장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바다의 장악은 제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왕이 된 첫해, 수군을 이끌고 백제 관미성을 공략했다.

4~5세기 즈음 진이 중국을 통일한 후 삼국지 시대가 막을 내리지만, 북방 유목민족이 중국 본토로 밀고 들어오면서 진은 강동으로 피신한다.  이것이 남북조 시대의 시작이다. 기본적으로 중국의 한족은 기병으로 무장한 북방민족을 이긴 적이 별로 없다. 그 만큼 북방 유목민족 기병이 강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무엇보다도 북방민족은 말의 품종자체가 한족의 말들보다 월등하기 때문에 한족들은 북방민족에게 번번이 패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강동에서는 품종 좋은 말을 키울 환경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무엇보다도 북방의 말이 필요했을 것임을 짐작해볼 수 있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남조 왕조의 하나였던 유송이라는 나라가 북위를 치기 위해 고구려 장수왕에게 말 800필을 요청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장수왕은 붉고 흰 고급말들을 보냈다고 하는데, 광개토대왕시대가 지나고 장수왕쯤 오면 당연히 고구려 기병은 동북아 최강이라 할 수 있다.

당시 남조국가들은 빼앗긴 북쪽 땅을 되찾기 위해 강력한 기병이 필요했고, 고구려는 그들이 원하는 질 좋은 말을 공급할 수 있다면, 수요와 공급이 충족되었기 때문에 무역이 형성될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고구려는 비싼 값에 말을 판다고 해도 남조 왕조들은 말을 안 살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고구려 입장에서는 경제적으로 상당히 이득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거기에 더하여 해로를 통한 운송비용은 육상무역 보다도 훨씬 저렴했을 것이라는 것은 말할 여지도 없다.

이제 다시 한번 지도를 거꾸로 보자. 국내성에서 광개토대왕은 백제와 신라 남쪽지역의 드넓은 바다를 봤을 것이다. 중국의 남조와 이문이 남는 교류를 통해 경제적으로 부강해지고, 동북아 해상무역을 장악하여 영원한 고구려 제국을 꿈꿨을 것이고 그것을 계획했다. 남조왕조들을 기병을 강하게 만듦으로 해서 북조왕조와 전쟁상태로 몰고가게 되면 당연히 고구려가 서토를 공략하기에는 그만큼 쉬워진다. 또한 동맹국인 신라를 지켜주기 위해 백제의 속국인 왜가 한반도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바다장악은 광개토대왕에게 중요한 과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광개토대왕은 남진정책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그 유업은 장수왕에게 이어지게 된다.

약 100년전 개화기 시절, 조선이 망국의 길을 걸었던 것은 농업만을 중요시한 자급자족 경제체제에서 무역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던 면이 있었고, 1960년대부터 시작된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은 바다를 통한 무역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에,  지금 G7 가입 가능성을 보고 있는 경제 대국에, 세계에서 9번째 군사강국이 됐다.  이렇게 경제가 받쳐준다면 군사강국은 당연히 될 수 있는 것이며, 광개토대왕 또한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멕시코에서 살고 있다. 당시 광개토대왕이 상상하지도 못한 곳에서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멕시코의 발전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광개토대왕이 꿈꾸웠던 그 웅대한 꿈, 계획은 어떤 지도자의 힘이 아닌 우리 후손 개개인 들의 힘으로 완성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